만든지 얼마나 됬다고 이사가나 싶지만…어쨌든 이사갑니다;;


http://dblog.textcube.com/


앞으론 이곳에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뭐 언젠가는 이글루스로 가고 말테지만. 흐흐.

그나저나 글은 어떻게 옮기는 걸까요…하여간 컴맹은 힘듭니다.


그럼, 새 블로그에서 계속 봅시다~
Posted by Dot A. Park

  제목은 저렇게 썼지만 내가 노래를 아예 안 부른다는 건 아니다. 단지 남 앞에서 노래를 잘 안 부를 뿐이랄까. 노래방 가는것도 안 좋아하고―가족이 끌고 갔던 적 빼곤 한번도 가 본적이 없다―애들이 안 시켜서 다행이지만 시켜도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이번 포스팅의 주제는 '왜 내가 남들 앞에선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도 뭔가 획기적인 태클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글을 써 본다. '글설리'라고 하던가? 키키.

<노래를 남 앞에서 부르지 않는 이유>

1.저 음치에요.

노래를 못 불러서 노래를 안 부른다는 변명은 정말 식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사실이거든. 사실 노래 못 부르는 것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거다. 박자를 못 맞춘다거나, 가사를 못 외운다거나, 음을 못 맞춘다거나. 몇 개씩 섞여 있던가.

내 경우엔 정말 제대로 음치다. 박자 가사 다 자신 있는데 이 음은 올라가지 않는다. 아니지, 올라가지 않는다기 보다 올라가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해야겠다.

2. 목소리에서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감을 발견하다.

사실 굳이 제일 큰 이유를 대라면 역시 이것이다. 내가 듣는 목소리와 남이 듣는 목소리간의 괴리감. 다들 목소리에 관해서 이런거 하나씩 있는 거잖아요.

개인적으로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그리 저음이 아니다. 중저음보다 조금 높은…그러니까, 보통들 말하는 평범한 목소리 말이다(뭐가 평범한 목소리 인지는 전혀 모르겠는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남이 듣는 내 목소리는 약간 심하게 저음이다. 최고의 충격은 역시 중2(맞나)때 아이들이 나보고 '담배 피워서 목소리 그렇게 됬냐.'고 했던 것일 것이다. 안 그래도 소심하고 뒤끝 긴 에한테 이런 소리를 하다니…흑.

나도 가끔 녹음을 하거나 큰 대야에 목을 집어넣고 말을 하고 깜짝 깜짝 놀란다. 이런 괴리감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어서 남 앞에선 노래를 안 부른다 이거다.

3. '노래방? 어우 경박해(이건 절대 제 이성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말 하니까 친구(였던가)가 '노래방은 노래를 잘 불러서 가는게 아니다.'라며 딴지를 걸었다. 시험 끝나고 노래방 가자고 했었거든.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봤다. 뭐 남 앞에서 노래 부르는건 부끄러워서 그렇다 치고, 노래방은 왜 안 가는가. 나처럼 노래를 그리 잘 부르지 못하시는 어머니도(죄송해요 어머니) 노래방 가서 노래도 부르고 하시는데 말이다.

  어쩌면 난 그냥 노래방이란 공간을 싫어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노래방은 좋지 않은 곳이다라는 이상한―이상할 건 없지만 소위 다수가 보기엔 충분히 이상할테지―개념이 자리잡은 것이다. 무의식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성적으로는 노래방에 대해 반감이 전혀 없어서 이다. 갈 생각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결론 : 난 딱히 누구 앞에서 노래 부르고 싶지 않아.


Posted by Dot A. Park

 동생이 휴지를 물어뜯고 집안을 마구잡이로 헤집는 걸 보면서―말리지 않아서 좀 혼났다―어머니께 나도 애기때 저랬냐고 물어봤다. 어머니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약간, 근데 많이는 안 그랬어.'

 어머니의 말을 애기때의 내가 다른 애기들에 비해 얌전했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난 이런 질문을 자주 했다. 애기때의 내 모습이 어땠는가에 대해서. 사실 다들 그렇지 않나? 누구든 자기 어렸을 때를 궁금해 하는건 당연하잖은가. 지금 글 보고 계신 당신도 이런 질문 해 보신적 있죠? 그렇죠? 흐흐. (아님 말구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지금의 내 성격과 얼핏 비슷한 면들이 많다.

 애기때의 나는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의 물통에 장난감을 잔뜩 넣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뭐랄까. 물건을 수집한다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난 뭔가를 수집해서 보관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돈 안되는 것들[…]. 남들이 보기엔 쓰레기도 난 유심히 보곤 한다. 부모님은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10년 동안 내 취미로 실랑이를 벌이는 거 같다.

 성격도 어려서 부터 얌전하고 소심했단다. 조금만 큰 소리 내도 쉽게 놀라고, 잘 울지도 않고, 많이 기어다니지도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린이집 다닐때는 정말 하루종일 책만 봤던거 같다. 춤 추는 시간이 있으면 꼭 피하거나 울어버리고.

 한국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란 말이 있다. 제목의 'What's learned in the cradle is carried to the grave.' 의미는 '요람에서 배운것이 무덤까지 간다.'란다. 하지만 내 이야기의 경우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거 같다. 버릇은 맞지만 세살때 라고 하긴 그렇고―장난감 얘기는 두 돌때 일화다―요람에서는 맞지만 배운것은 아니니 말이다.

 '요람에서 버릇 무덤까지 간다.' 정도면 맞으려나. 흐흐.


Posted by Dot A. Park
 독서실 옥상에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 뜨거운 코코아가 잔뜩 들어 있는 종이컵을 휙 던졌다.

 종이컵에서 나온 코코아는 땅에 떨어져 페인트가 벗겨진 옥상에 빗물을 따라 흘러내리고, 난 그 곡선을 가만히 서서 감상했다.

 문득 보니 시계, MP3, 신발이 모두 거꾸로 되어 있었다.

 비가 거세지자 옥상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위의 행동 중 실제로 한 것은 옥상에서 마신 코코아, 내리는 비, 거꾸로 찬 시계와 MP3뿐이다.

 난 코코아가 가득 든 종이컵을 던진 적도 없고, 신발은 거꾸로 신은 적도 없다.

 만약 이 가상의 행동을 진짜로 내가 했었다면 그 순간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Posted by Dot A. Park
글씨크기 어떻게 하는게 좋으세요?

전 사실 글씨 크기는 별로 신경을 안 씁니다.

뭐 빽빽하게 차 있는 글은 읽기가 어렵기는 하죠.

하지만 정말 관심 있는 글이라면 보게 되더라구요.

근데, 글씨 크기는 잘 몰라도, 글씨 간격은 약간 있는게 좋을 듯 해요.

글씨 간격이 좁으면 보기 힘들더라고요. 눈도 피곤하고.

(물론 전 컴맹이라 글씨 간격을 어떻게 벌리는지 모르지만 ㄱㅡ 가끔은 정말 )






그나저나 이거 노래가 왜 이리 야하냐;
생각해보면 내 제트오디오 묶음에 이런노래 많은거 같아 막 신음소리 들리고.
이터널모닝 2번 트랙 같은 건 특히 흠.

Posted by Dot A. Park

내 블로그를 살펴 보면서 생각한 것은, 댓글도 게스트북도 빈곤하다는 것.

그리고 평소에 내 블로깅 태도를 생각해 본다.



인과응보라 했던가.

생각해보면 나도 댓글 안 달고 그냥 쑤욱 본 다음에 지나치기 일수이다.

그러나 그런건 읽는 사람의 자유다. 댓글을 달든 안 달든. 블로거가 댓글을 달고 싶은 글을 써야 하는거지 읽는 사람들에게 뭐라 할 것이 아닌거다.



도트야, 사람들이 반응 보이고 싶어하는 글을 써 봐라 ㄱㅡ

(사실 혼자 지껄이는 이런 상황이 편하게 말 하는데는 최적이니까 대치 뭐가 고민인지 모르겠네. 날이 더워서 그래 날이 더워서.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촛불문화제 나가는 분들 디게 더울거 같다.)


Posted by Dot A. Park
재목이 너무 거만해서 살짝 걱정이지만, anyway….


 글 쓸 시간은 부족한데 생각은 정리가 안 되니 내가 하려는 말과 관련된 꽤나 유명한 짧은 이야기로 포스팅을 하려 한다.
 원문을 잃어버려서 순전히 내 기억으로만 쓰는 거라 각색이 약간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떤 노인이 있었다.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깊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서 많은 종교인들이 그를 선망했다.

 어느날 그와 몇 명의 사람들이 밀물에 갇히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때도 그는 신이 나를 구해 주실거란 믿음으로 가만히 앉아 기도를 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구조대가 도착했다. 사람들을 하나씩 헬기에 태우고 마지막으로 그를 구하려는데 그 믿음 깊은 사람이 구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구조대원의 어서 헬기에 올라타기를 권유해도 그는 그저 신이 나를 구해 주실거라고 하며 기도만을 했다.

 구조대원의 간곡한 부탁에도 노인이 계속 요지부동이자 구조대원을 하는 수 없이 헬기를 타고 떠나버렸다.

 결국 바닷물이 노인의 몸을 덮어 버렸을 때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은 신을 원망하며 울부짗었고, 신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나는 널 구하기 위해 헬기를 보냈는데 왜 나의 손길을 거부했느냐?」




무조건 의존하지 말고 움직여라. 그게 답이다.

잡담


 


Posted by Dot A. Park

Gossip

dot +/dot + blah = dlah : 2008/06/29 14:19
 누가 그러더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보다 약한 이를 아래에 깔아놓는 그런 본능이 있다고 하더라.

 반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맞는 말 같다. 아이들 딴에는 서로 맞는 애들끼리 노는 거일 테지만 사실 그 속에는 일종의 층계가 있다. 단지 자신들의 기준으로 그 층계를 평가한다랄까? 뭐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지만 말이다.

 내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나의 모습은 그 누구든 차별없이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신분으로서 그런 일을 쉽게할 수 없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인 거다.

 해서, 내가 내린 결정은


 내가 그 누구보다도 낮은 계단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뒤를 돌아볼때 아래를 내려다 볼 때 제가 있을 거에요.


 뭐 이따위의 마음? 흐흐.

 이래놓고 보니 내 상황이 참 멋지게 됬다.

 그 누구와도, 어떤 무리와도 친하게 지내지만 절대 친해질 수 없다는 것.

 결국 난 내 고독을 자의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 모습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런 위치 덕분에 난 (아마) 그 누구보다 객관성에 가까운 시선을 가지게 됬으니까.


Posted by Dot A. Park

본문에 앞서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생각의 실마리로 놓인 단어는 '모순'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죠. 여기 달걀이 있습니다. 이 달걀은 지금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달걀은 달걀인 동시에 달걀이 아니거든요. 달걀은 얼마든지 병아리가 될 수 있죠. 물론 무정란은 병아리가 될 수 없고 유정란이라도 사람에 의해 삶아지거나 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필요해지는 전제가 '모든 생명체는 편안해지려는 본능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생명체는 편안해지려 하는가. 이것에 대한 질문은 아직 생각을 더 해봐야 합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 확실한 전제는 아니거든요. 대전제가 부실하니 갑자기 앞으로 전개할 내용 전체가 부실해지네요. 하지만, 전 우선 이 전제를 가지고 계속 글을 쓰겠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달걀은 달걀인 동시에 달걀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순된 상황에서 생명체는 혼란을 느낍니다. 한 번에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은 안정된 상황일지 몰라도 절대 편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은 비단 달걀의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라는 커다란 모순이 있죠. 꽃씨는 꽃이 될 수 있다는 모순이 있고, 올챙이는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밖에 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지요.


  모순을 없애고 조금 더 편안해 지고자 위해 달걀은 깨져서 병아리가 됩니다. 이게 바로 변화'인 겁니다. 달걀이 '깨진다.'라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 병아리가 됐으니까요. 분명히 병아리는 달걀이 아닙니다.

 자, 이제 달걀은 병아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아리는 아직 안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병아리는 여전히 병아리인 동시에 병아리가 아닙니다. 병아리는 '닭'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병아리는 한때 달걀이었다는 모순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달걀이 갑자기 병아리가 되었으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달걀이 병아리로 변하는 순간이 '갑자기'는 아니지만 좀 더 넓게 우주까지 갈 필요 없이 지구의 처지에서 보면 달걀이 병아리로 변하는 과정을 '갑자기'라 말해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문명의 발생과 부귀 몰락도 지구 앞에선 '한 순간'이라 표현되니까요.

 이 때 병아리가 달걀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기에 변하지 않는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병아리가 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모순입니다. 미래의 일에 대한 모순이니까요. 외부조건을 모두 없애더라도 개인적 병이 있을 수 있고, 심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으니 변할 수 있는 모순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병아리는 닭이 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어쩌면 미래에 대한 모순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죠. 꽃씨가 꽃이 되어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 역시 가능성입니다.

 인간의 경우엔 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그렇기에 그 만큼 수 많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입니다. 전지적 모순인 '사는 동시에 죽는다.'의 경우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없죠. 죽음을 벗어날 생명체는 없으니까요.


 이제 병아리는 다시 모순을 없애려고 닭으로 변화합니다.

  평안을 찾기 위한 노력, 변화. 그래서 병아리는 닭이 됩니다. 생명체들도 계속 변화합니다. 좀 더 편하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순이 없애는 과정. 그것이 변화입니다.


 이 정도로 닭, 혹은 병아리, 혹은 달걀에 대한 얘기를 끝내겠습니다. 충분히 제가 생각하는 변화와 모순이 무엇인가가 전달됐으리라 싶어서요.

  지금까지 얘기한 '달걀의 예에 대해 마지막으로 하는 질문은, 닭은 이제 변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질문의 답은 '아니요.'입니다. 여전히 대전제인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라는 모순이 있잖아요.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변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변화는 막을 수 없습니다. 생명체로서의 본능과 모순된 현실의 충동은 그 수가 끝이 없는데 어떻게 모든 모순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모든 모순이 사라진다 해도 직접 붙인 이름처럼 '전지적인 모순'이 계속해서 있을 테니 말이죠.


 우리가 대할 수 있는 자세는 그저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것뿐이 아닐는지 생각해 봅니다.




Posted by Dot A. Park

육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노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힘도 운동신경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몸 보다 사고와 정신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그 만큼 몸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이다.

내가 사람을 볼 때 외모보다 마음과 생각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내가 이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청결을 좋아하고 언제나 깔끔해지려는 이유는, 내 몸이든 아음이든 객관적으로 볼 때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는 것들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꾸만 선해지려는 이유는, 악의 입장에서 볼 때 순수하게 악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누우려 들지 않는 이유는, 눕는 순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어도 움직이고 계속 웃는 이유는, 당신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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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t A. Park
 이상하게 미치도록 피곤한 오늘, 오랜만에 야간자습이 일찍 끝났다.

 지하철로 내려갔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이 많았다. 꽉 찬 지하철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데 옆에서 싸우는 듯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두 아저씨가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는데 그 모습이 무섭거나 짜증나는게 아니라 즐겁더라. 마치 흥겨운 축제판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주변 사람들도 다들 말리는 척 하면서 웃고. 친구가 원래 싸움 구경과 불 구경이 세상에서 재일 재밌는 거라고 말하면서 웃었지만 평소에는 그런것들 별로였던 내가 실실 웃었다는건 살짝 충격적인 일이었다. 힘들어서 그런가.
 결국 한 아저씨가 마무리 하더군.


 '이게 한국 사는 재미라니까. 아,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는게 아쉽다 진짜.'


 
 말 나온 김에 지하철 얘기 하나 더 하겠다.

 (싸우던 아저씨들의 말을 인용하자면)두 어르신이 열심히 싸우시는데 어디선가 곡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방향으로 나 역시 고개를 돌렸다.

 딱 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왼손에 지팡이 오른손에 돈 바구니를 들고 두 아저씨가 싸우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중요한 건 여타 봐 오던 다른 지하철의 걸인들과는 다르게 카세트 테이프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닌 입으로 직접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 어찌나 구슬프던지. 난 누가 아파서 끙끙대는 줄 알았지 뭐야.

 잠시 그 걸인이야 말로 진실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적어도 저는 진짜 거지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가난하면 노래하나 틀 돈이 없어서 저렇게 직접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겠나. 아니지, 어쩌면 더 약은 걸지도 몰라. 구걸 하는데에 돈 따위 투자 않겠다는 걸 수도 있잖아. 혹은 나 같은 사람들로 부터 동정심을 유발 하려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이상한 사람 또 한 명 보면서 지하철에서 내렸다.


 집에 가는 길 버스 안. 친구가 버스에서 내린 뒤에 공상에 잠겨 있는데 버스 기사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로를 막고있던 차 주인이 지나가면서 자기를 째려 봤다나. 애들도 몇 명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은지 상욕을 섞어가며 계속 혼자 고함을 질렀댔다.


 ―저기요 아저씨, 벌써 10분 전에 자동차 지나갔거든요?


 이렇게 말 하고 싶었지만 집에 빨리 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꾹 참았다. 아님 배짱이 없는 거거나?


 여전히 버스 안, 어떤 꼬마가 가벼운 장난을 쳤다.

 버스 안전봉(이라고 하던가)에 우산을 걸어 놨는데 버스가 한 번 출렁일 때마다 우산이 춤을 추면서 기하학적 곡선을 그렸다. 휘잉, 선 하나, 휘잉, 선 둘.
 우산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던 순간에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추었고 반대편에 앉아있던 꼬마의 어머니가 달려들어 우산을 내리고 꼬마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마 장난 치지 말라고, 훈계를 위해 그런거겠지만, 난 그 모습이 그렇게 무섭더라.


 집에와서 오늘 밤에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폭력적인 장면을 세번이나 봤다. 그 이상 봤으려나. 성적인 장면도 꽤 많이 본 거 같고―우선 려성 동무들의 치마는 학생들 마저도 다 짧았으니까―그 만큼 커플도 많이 본 듯.
 평소에도 이런 생각 많이 하는데 이정도 조건에서라면 세상이 멸망 하려나란 생각도 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괜히 그런 생각 들더라.
 아아 뭔 소리냐. 이제 시험이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나 하자.


  오늘 밤은 정말 이상했어. 아니, 낯설었어. 예전에 자주 봤던 장면이었겠지만 너무 평범해진 일상에 익숙해 졌는지 이정도 사건들이 모두 낮설더라. 당신의 밤에는 이런 낯설음과 이상함이 없기를.

좋은 하루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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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t A. Park